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Ioannes Calvinus, Jean Calvin, 1509-1564)은 ‘오직 성경에 따라서(sola Scriptura)’ 개혁신학을 선구적으로 수행한 성경의 교사(doctor)요, 해석자(interpres)요, 수호자(custos)였다.
칼빈의 사상은 그를 잇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치(精緻)하게 교리화되었음이 사실이나 단지 개혁신학의 효시(嚆矢)로서만 의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칼빈의 후예들 가운데서 칼빈에 필적(匹敵)할 만큼 성경의 진리를 그 자체로서 심오하고 부요하게 다루었던 신학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칼빈은 돌아갈 곳 없는 망명객으로서 오직 하늘의 본향을 바라며 지상의 신학(theologia stadii),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viatoris)을 겸손하게 전개했다.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신학적이며 그 가운데 신학을 가르치는 길(via docendi)이 또한 이미 계시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칼빈을 계승한 후대의 신학자들은 그의 신학에 제시된 성경의 진리 자체보다 그것을 그들이 속한 상황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칼빈의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와 성도의 신앙과 삶에 역사하는 실천적 교리를 도출해 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칼빈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칼빈을 풀어내는데 그들의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들을 저술함에 있어서 마땅히 그것들이 기독교 강요를 위시한 칼빈의 작품들과 함께 읽혀져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참 신학이 펼치는 성경 교리와 경건의 비밀을 맛보기 위해서는 혹은 칼빈으로부터, 혹은 칼빈과 함께, 혹은 칼빈 가운데서 칼빈주의를 읽어야 한다. 칼빈주의의 옥합에 칼빈의 향유가 온전히 담겨져야 한다.
역사상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이 각각의 상황에 고유하게 토착화되면서 여러 양상으로 수립되었다. 칼빈의 가르침이 스위스에서는 베자로부터 프란시스 뚤레틴에 이르는 제네바 개혁주의로, 독일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에 기초한 독일 개혁신학으로, 화란에서는 화란 개혁신학으로,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주의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로 전개되었다. 미국의 장로교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가 역사적으로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다. 각국의 칼빈주의는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가르침으로부터 기원한 언약신학이라는 공통의 열매를 맺었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칼빈의 가르침이 칼빈주의로 교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긴 필연적인 산물로서 전체 구속사와 개인의 구원서정을 첫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의의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러므로 언약신학을 핵심 주제로 전개된 칼빈주의의 실체와 의의와 가치는 칼빈의 신학 자체를 도외시하고는 합당하게 논의될 수 없다. ‘토착화된 칼빈의 신학’으로서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우선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이 지나치게 법정적 조건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제한했다는 비판도 종종 제기되는데 이는 칼빈주의를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칼빈의 신학에 정초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칼빈은 신약과 구약의 일체성(unitas)과 연속성(continuitas)을 공히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중보자이심으로부터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에 이르렀다.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심으로써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중보하심이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구원론과 교회론의 기초로서 기독론이 중시되었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대제사장적 기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전체 과정에 역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의 의를 전가 받아서 성도의 인격뿐만 아니라 행위도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계시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는 사실이 예정론과 섭리론의 핵심 주제로 떠올랐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중보자 되심이 신학적으로 합당하게 다루어짐으로써 로고스와 노모스, 복음과 율법, 명령하심과 이루심에 대한 구속사적이며 구원론적인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리에 대한 신학적 지평이 확보되었다.
칼빈의 신학은 자주 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획일적이고 제한된 관점으로 편협하게 이해되어 왔다. 대체로 이 경우 그들은 칼빈을 충분히 읽고 소화하기 보다는 이용하는데 그쳤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에게 특히 현저했다. 한국의 장로교는 서구교회들과는 달리 칼빈의 신학 자체가 아니라 이미 서구사회에 토착화된 칼빈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개혁교회로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미국의 장로교가 한국 칼빈주의의 씨앗으로서 심겨졌다. 그것이 자라는 과정에서 화란 본토와 미국의 개혁교단으로부터 전해진 화란 개혁주의 신학이 함께 큰 작용을 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대, 소 요리문답서의 가르침을 채택함으로써 언약사상에 기초한 구원의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를 중시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교리에 따라서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성도의 바람직한 삶의 헌신이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수용한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을 충실히 전승하여 발전시킨 역사적 개혁주의였다. 그러므로 진정한 한국적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 자체와 그것이 칼빈주의로 수립되어 가는 과정을 신학적으로 합당하게 파악하는 일로부터 추구되어야 한다.
서구의 교회와 다름없이 한국의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등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관한 논쟁들을 겪으며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칼빈주의의 성경진리에의 적합성이라는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칼빈주의 교리의 기원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조차 칼빈의 가르침 자체에 문의(問議)함으로써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많은 경우 칼빈의 신학은 그 자체로서 연구되기 보다는 단지 칼빈주의의 가르침을 통해서 추론될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은사주의와 문화주의로 개혁신학이 도전을 받게 된 20세기 후반을 거쳐 현재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무름의 영적이며 사회적 의의, 그 공로의 적용으로 인한 성도의 삶의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보혜사 성령의 작용 등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을 묻는 많은 질문들이 안팎으로 던져졌지만 칼빈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답들을 찾으려는 노력은 미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극복되었다거나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칼빈의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여된 이러한 비판은 편견이나 궤변이 되기 쉽다.
종종 칼빈의 신학은 심지어 그것을 자신들의 신학적 근간으로 여기던 학자들에 의해서조차 그 정체성이 부인될 정도로 뒤틀리기도 했다. 한 시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통주의자들이 스스로 칼빈의 후예들임을 자처하면서 칼빈의 사상을 자신들의 신학적 틀에 맞추어 변증법적으로 각색한 것을 굳이 예로 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 팽배해 가고 있는 교회안의 세속주의와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주의가 오히려 절대시 된다. 최고의 가치를 편의와 실용의 잣대로 판단하고자 하며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부조리한 것으로 여기는 세태가 지배한다. 심지어 개혁교회 내에도 이러한 조류가 밀려 들어와서 진리를 타협꺼리로 삼아서라도 공존하는 것이 순교의 피를 뿌리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다고 호도(糊塗)한다.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기독교의 고유성은 단지 종교적 배타성으로 치부된다.
한국 교회는 수 년 전에 선교 120주년을 갓 넘어섰다. 우리가 이어 받은 서구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오랜 기간 수많은 진통을 감내해 왔다. 교회에는 도전과 고난은 있을지언정 위기와 절망은 없다. 작금 한국 교회는 한국적 칼빈주의를 더욱 깊이 심화시켜가야 할 전환기적 사명을 역사적으로 부여받고 있다. 진정 지금이야말로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창조와 구원의 교리와 성도의 삶과 교회의 교리를 말씀의 깊이대로 추구해야 할 때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올바로 수립해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자녀 된 자로서 그와 함께 상속자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리에 서야 함을 지고의 기쁨이자 소망으로 여겨야 한다(롬 8:17). 지금이 바로 성경 말씀의 심오함과 부요함이 배어 나오는 칼빈의 신학에 터 잡아 참 신학을 추구함으로써 참 교회를 세우고 성도의 참 된 삶의 교리를 세우고 진작해야 할 때이다.
칼빈주의는 칼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지금 이곳으로 나아와야 한다. 일체성과 연속성은 칼빈의 신학과 칼빈주의 사이에서가 아니라 칼빈의 칼빈신학과 개혁주의자들의 칼빈신학 사이에 논구되어야 한다.
한국 칼빈신학 연구소(KICTS)의 일차적 목적은 칼빈이 가르친 교의(敎義)의 실체(實體, substantia)와 실제(實際, veritas)를 연구하여 파악하고 이를 성경적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고, 변증하는 참 교리와 경건의 개요(summa doctrinae et pietatis verae)로서 체계화함으로써 ‘칼빈신학’을 조직신학적으로 수립함에 있다. 이와 함께 칼빈의 작품들과 관련 자료들을 주제별, 인물별, 영역별로 분류하여 열람케 하며, 신학자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목회자와 성도의 배움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한국 교회가 말씀의 진리 가운데 하나가 되며 나아가서 민족 통일의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땅 끝 까지 전하는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견고한 진리의 터를 닦고자 한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한국 칼빈주의를 칼빈의 신학 위에 세우는 개혁주의의 본연의 요구에 부응할 것이다.
목적과사업
╋ 칼빈의 교의를 연구함으로써 조직신학적으로 체계화한다.
╋ 칼빈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전승, 구현, 심화되어 왔는지를 제네바 개혁신학, 독일 개혁신학, 화란 개혁신학, 잉글랜드 청교도신학, 스코틀랜드 장로교신학, 미국 장로교신학 등을 부문별로 고찰함으로써 파악한다.
╋ 칼빈신학의 교훈적, 고백적, 변증적 의의와 가치를 조명하고 적용함으로써 교회와 성도에게 마땅한 실천적 교리를 제시한다.
▸ 교훈적(pedagogical): 성경의 가르침을 교리로 삼는다.
▸ 고백적(confessional): 교리를 신앙고백의 조항으로 선포한다.
▸ 변증적(apologetical): 고백의 교리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변증한다.
╋ 칼빈신학을 근간(根幹)으로 삼아서 형성, 발전되어 온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수립하고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할 개혁교회로서의 바림직한 모습을 제시한다.
[칼빈의 칼빈신학]
◐: 단기추진사업 ◑: 장기추진사업
╋ 칼빈의 작품을 번역한다. 일차적으로 기독교 강요(라틴, 1536 초판과 1559년 마지막 판), 로마서 주석(라틴), 창세기 주석(라틴), 제네바 신앙 교육서(불, 라틴), 신명기 설교집(불), 사도행전 설교집(불)을 번역한다. ◐,◑
